읍·면별 마을의 유래
제1절 영덕읍
제2절 강구면
제3절 남정면
제4절 달산면
제5절 지품면
제6절 축산면
제7절 영해면
제8절 병곡면
제9절 창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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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절 영덕읍(盈德邑)

▒ 구미리(九美里)

  구미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의 위치가 구비구비 흐르는 오십천(五十川) 안쪽에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때(661∼681)에 한 선비가 들어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당시 마을 앞의 삼밭(麻田)을 이용하여 화적을 물리쳤기 때문에 구마동(仇麻洞)으로 불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盈德縣) 읍내면(邑內面)에 소속되어 「구미마(仇尾麻)」 「구마(仇麻)」 등으로 불렀으며 갑오개혁(甲午改革) 뒤인 1895년(高宗 32년) 5월 26일 칙령(勅令)에 의해 종전의 현(縣)을 군(郡)으로 개칭할 때 구미리는 영덕군에 속했으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는 부령(府令) 제111호(1913.12.29 公布)로 부·군·면(府郡面)을 자의로 폐합할 때 구미동이라 하여 영덕면(盈德面)에 편입되어 오다가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大統領令) 제9409호(1979.04.07 公布)에 의해 영덕면이 읍(邑)으로 승격됨에 따라 구미리는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1988.04.30 公布)로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구미동은 구미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구미리의 위치는 동쪽은 화수리와 이웃하며, 남쪽은 오십천과 무릉산이 있고, 서쪽은 지품면과 경계하고 북쪽은 화림산(華林山)이 있다.

 
 
새마을 (新村) :
구미리 서쪽에 새로 생긴 마을임
 
재궁마·재삿마·수정동(水晶洞) :
15세기말(成宗 22년)에 평산신씨(平山申氏)의 영덕
입향조(入鄕祖)인 신희(申禧)의 재실(齋室)인 수정재(水晶齋)가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임.
 
주막거리(거릿마을) :
구미리 남쪽 길가에 옛날 주막(酒幕)이 있는데서 붙여진 이름임.
 
개닥골 :
굴깨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행교골 :
중산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남강서원이 있었다 하여 붙은 이름임.
 

▒ 화개리(華開里)

  화개리 동명의 유래는 화림산(華林山) 밑이 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읍내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동상동, 삼근동, 서상동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화개동이라 하여 영덕면에 소속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화개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1, 2리로 분동되어 있다.
  화개리는 읍 소재지에 위치하는 마을로 동은 덕곡리, 서는 천전리와 지품면 오천리, 남은 남석리와 덕곡리, 북은 화수리와 구미리가 있다.

 
 
동문밖(東門外) :
화개리 남동쪽에 있는 마을로 영덕읍성의 동문 밖이 되는 마을로 10세기 후기인 고려(高麗)시대에 주씨(朱氏)와 윤씨(尹氏)가 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동상동(東上洞) :
동문 밖 동쪽에 있는 마을임.
 
삼근동(三近洞) :
동문 밖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읍(장터)이 가깝고(邑), 산이 가깝고(華林山), 물이 가깝다(五十川)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약 16세기경 안씨(安氏)와 장씨(張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그 뒤 온양방씨(溫陽方氏)와 평산신씨(平山申氏)가 입주하였다고 한다.
 
서상동(西上洞) :
동문 밖 서쪽에 있는 마을임.
 
너더미골(미더미골) :
무덤골이 변해서 미더미골로 불려졌다.
당시 불교식 장례의식(화장)으로 장례를 치르고 뼈가루를 담은 골호가 많이 매장된 곳이다.
 
▒ 남석리(南石里)

  남석리 동명의 유래는 남부동(南部洞)의 「남(南)」자와 비석동(碑石洞)의 「석(石)」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읍내면 지역으로 상장동(上場洞), 하장동(下場洞), 남부동(南部洞), 상남동(上南洞) 등으로 불리어 오다가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총독부령(總督府令) 제111호로 전국의 부·군·면(府郡面)을 통폐합할 때 상장동, 하장동, 남부동, 상남동, 하남동, 중남동과 비석동의 일부를 병합하여 남석동이라 하고 영덕면에 소속시켰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군조례(郡條例) 제972호로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남석리가 되었으며 현재 행정동으로는 남석1, 2, 3리로 분동되어 있다.

 
 
남부동(남문거리, 남부) :
남석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옛 영덕읍성(盈德邑城)의 남문(南門)이 있었는데 상남문, 중남문, 하남문의 세 마을로 나누어 있었음.
 
비석동 :
조선시대 영덕 현령(縣令)의 치적불망비(治蹟不忘碑)가 많이 있어 붙여진 이름임.
 
상남문(上南門, 두들목) :
남문거리 위에 있는 마을로 영덕읍에서 지대가 높은 곳이므로 일명 두들목이라 하였음.
 
장터(場基) :
중남문에 딸렸던 마을로 현재 학원(學院)이 있는 전방 3거리에는 4일장이 섰으며 양조장 앞에는 9일장이 섰다. 이 시장은 어물전이 이동하는 데 따라 곡류(穀類)와 잡화 등이 반대쪽에 서게 되었다고 한다. 또 남문거리 아래에 있는 마을을 하남문(下南門)이라 했으며 장터 아래에 있는 마을을 하장(下場 : 하장기)이라 하였다.

         

▒ 덕곡리(德谷里)

  덕곡리 동명의 유래는 덕천리(德川里)의 덕(德)자와 우곡리(右谷里)의 곡(谷)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일설에는 내곡리(內谷里)의 곡자를 써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한다. 이 마을은 신라(新羅) 문무왕(文武王) 연간인 7세기 후반에 순흥안씨(順興安氏)가 개척하였고, 덕천(德川)이라 하였다. 덕이 많은 곳과 마을 한가운데 내가 흐른다 하여 이렇게 불리웠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읍내면(邑內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로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내곡동, 외곡동, 덕천동, 우곡동의 일부 지역을 병합하여 덕곡동이라 하고 영덕면에 소속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로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덕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덕곡리의 위치는 동은 덕곡천(德谷川)이 있으며, 서남은 남석리, 동남은 우곡리, 북은 화수리와 접해 있는 영덕읍 소재지의 중심마을이다.

 
 
골안(谷內) :
덕내(德川) 안쪽에 있는 마을.
 
덕내(德川) :
도매두들과 골안 사이에 있는 마을로 덕곡리에서 가장 큰 마을임.
 
도매두들 :
덕내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해일(海溢) 때 도마만큼 남았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 천전리(川前里)

  천전리 동명의 유래는 내(川)가 앞(前)에 있으므로 「내앞」 또는 천전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17세기 중기인 현종(顯宗) 연간에 야성김씨(野城金氏) 김취린(金就隣)의 후손들이 마을을 개척, 정착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읍내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자의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천전동이라 하여 영덕면의 관할로 하였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천전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영덕읍 소재지에서 0.7km 떨어진 마을로 동은 오십천, 남석리, 서는 칠령산, 강구면 상직리, 남은 남산리, 북은 화개리가 있다.

 
 
아룻내(아릿내피, 下川前) :
내앞 아래쪽에 있는 마을임.
 
웃내(웃내피, 上川前) :
무릉산
 
수운산 :
덕내 남쪽에 있는 마을로 옛날 해일(海溢) 때 도마만큼 남았었다고 해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적은 덤배기 :
아룻내 서쪽에 있는 고개.
 
▒ 남산리(南山里)

  남산리 동명의 유래는 남산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남산 1리는 15세기 후기인 성종(成宗) 연간에 안씨(安氏)라는 분이 개척했으며 그뒤 김씨가 들어왔다고 한다. 남산 2리는 밀양손씨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읍내면(邑內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總督府令) 제111호로 일제(日帝)가 부·군·면(府郡面)을 통폐합 할 때 우곡동(右谷洞)의 일부와 중남면(中南面) 둔리(屯里) 일부, 지곡동(枝谷洞)을 병합하여 남산(南山) 아래에 위치한다 하여 남산동이라 하고 영덕면에 편입시켰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에 의해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행정구역으로 1, 2리로 분동되어 있다. 남산리의 위치는 오십천 건너 강구면 금호리와 마주 보고 있으며, 뒤로는 칠령산(七嶺山)이 둘러싸고 있다. 남은 강구면과 경계인 입내산(入來山)이 있으며 북은 영덕대교가 있다.
 
 
가짓골(枝谷, 가죽골) :
마을 형태가 나무가지 같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두일(둔호) 서북쪽 골짜기에 있음. 조선시대에 갓바치들이 살았다고 하여 가죽골이라고도 함.
 
대밭골(竹山里, 절마) :
둔호 남쪽 두런산(입래산) 아래에 있는 마을임.
 
둔호(屯湖, 두일 屯里) :
남산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마을 앞에 호수가 있음.
 
숲 지 :
남산 1리로 마을 앞에 숲이 무성하다고 붙은 이름으로 1959년 사라호 태풍으로 숲이 유실되었음.

         

▒ 우곡리(右谷里)

  우곡리 동명의 유래는 읍 남쪽 오른쪽 골짜기라 하여 우루실 또는 우곡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어느 때인지 장씨(張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 읍내면 지역으로서 마을 남쪽에 강이 흐르므로 남강(南江)이라 불러오다가 남강서원(南江書院)이 창건되자 서원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 어쨌든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비석동 일부를 병합하여 우곡동이라 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로 개칭할 때 우곡리가 되어 오늘에 이른다.
   우곡리의 위치는 동은 고불봉과 강구면 하저리, 서는 오십천과 남석리, 남은 강구면 금호리, 북은 덕곡리와 연해 있으며 현 영덕읍 사무소에서 6백m 동쪽에 있다.

 
 
남강서원 터 :
우곡리 169번지 일대에 있었던 남강서원의 터임.

 
댓대대 :
동리 동쪽 뒤에 있는 대나무 밭으로 고종 때 남강서원이 훼철될 때 퇴계 이황, 회재 이언적 양 선생의 위패를 묻었다고 함.
 
금산 삐알 :
남강서원이 있던 동쪽 뒤산 비탈로 금을 캤다고 하여 붙은 이름임.
 
호호대(浩浩臺) :
경관이 아름답고 이에 오르면 호연지기가 일어난다고 한다.
 
망월봉(望月峯) :
모양이 望月(보름달)과 같다 하여 붙인 이름.

         

▒ 화수리(華水里)

  화수리는 조선시대 영덕현의 동면 주등과 미동이다. 1914년 3월 1일 부군 통폐합 때에 영덕면이 생기면서 동면에서 이속하여 오면서 생긴 이름이다.
  화수 1리인 주등은 15세기경 파평윤씨가 개척하였다고 하며, 화수 2리인 미동은 약 400여년 전에 강릉유씨가 마을을 개척하였고 마을 주변의 산과 내의 전경이 아름다워 미동이라 불렀다고 한다. 주등이란 명칭은 고려시대부터 주등역이 있어 주점과 숙박시설이 많았다 하여 붙인 이름이라고 한다.

 
 
밋대골 :
주등 남서쪽에 있는 마을.
 
삼거리 :
주등 북동쪽에 있는 마을.
 
자부티 골 :
삼거리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
 
홍둣골(紅圖院) :
조선시대 역원이 있던 곳으로 경치가 좋으며, 약수가 유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찾아 온 곳으로 유명함.
 
반달산 :
마을 앞산으로 인해서 이 마을에는 옛부터 미인이 많다고 한다.

 

▒ 삼계리(三溪里)

  삼계리 동명의 유래는 흰댕잇골, 땟골, 웃골 등 세 골짜기의 물이 합하는 곳이므로 시거랑, 시걸이 변하여 시거리 또는 삼계라 하였다.
 
  이 마을은 류유(柳)가 문종(文宗), 단종(端宗) 때에 삼가현감(三嘉縣監)으로 재임하다가 단종 폐위 소식을 듣고 사직하여 이곳으로 들어와 개척하였다고 하며, 삼구당(三龜堂) 신공망(申公望)이 들어와 평산신씨 입향조가 되었으며, 야성김씨 김수문(金秀文)도 이곳에 정착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삼계동이라 하여 오보면(烏保面)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영덕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종전의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삼계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삼계리의 위치는 동은 대탄리, 창포리, 서는 화수리, 남은 덕곡리와 강구면 하저리, 북은 오보리, 매정리가 있다.
 
 
아릿모치 :
삼계 아래에 있는 마을임.
 
댓대대 :
삼계 위에 있는 마을임.

         

▒ 매정리(梅亭里)

  매정리 이명(里名)의 유래는 매정(梅亭)의 매(梅)자와 양정(良亭)의 정(亭)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東面) 지역이었으며, 1914년 3월 1일 부령(府令) 제111호로 행정구역을 폐합할 때 기곡동, 성황동, 신리동, 매령동, 양정동을 병합하여 매정동이라 하여 오보면(烏保面)에 편입시켰다가 193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덕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79년에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매정리는 영덕읍에 소속되었으며 1988년에 동을 리로 개칭할 때 매정동은 매정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동(行政洞)으로는 1,2,3리로 분동되어 있다.
매정리의 위치는 동은 노물리, 오보리, 서는 화수리, 남은 삼계리, 북은 석리가 있다.

 
 
맷재(梅嶺) :
매정리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15세기 중기인 세조(世祖) 연간에 순흥안씨가 개척했다고 함.
 
새텃골(新里洞) :
텃골 북쪽에 새로 된 마을임.
 
샛골(簡谷) :
석리와 맷재 사이에 있는 마을로 15세기 중기인 세조(世祖) 연간에 야성김씨(野城金氏)가 개척했다고 함.
 
성황동(城隍洞) :
양정 남쪽에 서낭당이 있는 마을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영천이씨(永川李氏)로 조선시대 만호(萬戶) 벼슬을 가진 분이 개척했다고 함.
 
양정(良亭·羊暘) :
매정리에 있는 마을로 계곡이 정자형(亭字形) 같다 하여 붙은 이름. 15세기 중기인 세조 연간에 대흥백씨(大興白氏)가 개척했다고 함.
 
텃골(基谷) :
맷재 북동쪽에 있는 마을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경주김씨(慶州金氏)가 개척했다고 함.
 

▒ 석 리(石里)

  석리 동명의 유래는 돌이 많은 곳이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이 마을은 17세기경인 인조(仁祖) 연간 병자호란때 순흥안씨(順興安氏)가 이곳에 피난하여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그 뒤 김해김씨(金海金氏)와 김녕김씨(金寧金氏)가 정착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지역 이었으나 1914년 3월 1일 일제(日帝)가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예진동 돌면동을 병합하여 석리라 하고 오보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영덕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은 영덕읍 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12km 거리에 있는 해안 마을로 동은 동해, 서는 등달골산과 매정리가 있으며 남은 노물리, 북은 축산면 경정리가 있다.

 
 
돌면(乭面) :
석리에서 으뜸되는 마을임.
 
예진(芮津) :
석리 동쪽에 있는 마을로 돌이 많아 돌미역이 많이 생산됨.

         

▒ 노물리(老勿里)

  노물리 동명의 유래는 알 수 없으나 「노물(老勿)」이란 늙지 말라는 뜻으로써 늙지않는 즉 장수(長壽)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 같다. 노물이란 이름은 1789년의 「호구총수」에도 나오며, 물(勿)자는 고구려 계통의 언어로 아마 4∼5세기 경 고구려가 남하하여 청하와 흥해를 경계로 할 때, 영덕의 지명인 야시홀이란 이름이 붙을 당시에 같이 생긴 이름으로 보인다.
  이 마을은 13세기경에 안씨(安氏), 정씨(鄭氏), 박씨(朴氏) 등이 정착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東面) 지역으로 노물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부·군·면(府郡面)을 폐합할 때 노내리(老內里)를 병합하여 오보면(烏保面)에 편입되어 오다가 1934년 행정구역 변경에 따라 영덕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호로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될 때 영덕읍에 소속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매정리, 남은 오보리, 북은 석리가 있다.

 
 
노내리(老內里 : 골마) :
노물 안쪽에 있는 마을임.
 
섬(성)뚝마 :
섬(성)뚝 남쪽에 있는 마을임.
 
섬뚝새 :
섬뚝 동쪽에 있는 마을임.

         

▒ 대탄리(大灘里)

  대탄리 동명의 유래는 동해 바닷가 큰 여울 옆이 되므로 해여울, 해월, 또는 대탄이라 하였다.
  이 마을은 16세기경에 정영용(鄭英用)이란 분이 마을을 개척하고 마을 이름을 향월(香月)이라 하였는데 19세기 중기에 강씨(姜氏)라는 분이 들어와 마을에 큰 여울이 있다 하여 대탄이라 하였다 한다.
  이 마을은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총독부령 제111호로 전국의 행정구역을 통폐합 할 때 대탄동이라 하여 오보면(烏保面)에 편입시켰다가 1934년 4월 1일 영덕면에 편입되어 오다가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됨에 따라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대탄리가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대탄리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삼계리, 남은 창포리, 북은 오보리가 있다.

         

 
약물내기 :
동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로 약물이 남.
 
노고지리 콧잔등 바우 :
동리 남서쪽에 있는 노고지리 봉에 있는 등성이로 노고지리의 콧등처럼 뽀족하다고 하여 붙은 이름임
 
▒ 오보리(烏保里)

  오보리 동명의 유래는 마을 입구에 있는 바위가 까마귀(烏)의 머리처럼 생겼다 하여 ‘올치미’라고 불렀는데, 이 말이 전해 내려오면서 오보(烏保)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마을은 15세기경 유씨(劉氏)라는 분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한다.
  이 마을은 본래 오보부곡(烏保部曲)이 있던 곳으로써 조선시대에는 영덕군 동면지역으로 오보라 하였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오보동이라 하여 오보면에 편입되었다가 1934년 4월 1일 영덕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동은 동해, 서는 들을 사이에 두고 매정리와 연해 있고 남은 대탄리, 북은 노물리가 있다.

         

 
아릿맛골 :
오보 아래에 있는 마을임.
 
웃 맛골 :
오보 윗쪽에 있는 마을임.

         

▒ 창포리(菖浦里)

  창포리 동명의 유래는 이 마을은 붓꽃이 많이 피는 갯가가 되므로 「붓개」 또는 창포라 하였다.
이 마을은 통일신라시기인 7세기경에 임씨(林氏)가 개척했다 하며, 그 뒤 조선 후기 인조(仁祖) 연간인 17세기경 임경업(林慶業) 장군의 후예가 이 마을에 정착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창포동이라 하여 오보면(烏保面)에 속했다가 1934년 4월 1일 영덕면에 편입되었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속했으며 1988년 5월 1일 동(洞)을 리(里)로 개칭할 때 창포리로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의 위치는 영덕읍 소재지에서 동북 해안쪽으로 8km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동은 동해에 임하고, 서는 별반산(別畔山), 남은 대부리(大夫里), 북은 대탄리가 있다.

         

 
웃마(웃모치, 상창포) :
창포 윗쪽에 있는 마을임.
 
중간마(중간모치) :
웃마와 아릿마 중간에 있는 마을임.
 
아릿마(아릿모치, 하창포) :
창포 아래에 있는 마을임.
 
봉의뜨미(별반산) :
웃마 북쪽에 있는 산으로 조선시대에 별반산 봉수대가 있어 남으로는 황석산, 북으로는 대소산 봉수대와 연결하였다.
 

▒ 대부리(大夫里)

  대부리 동명의 유래는 16세기경 안씨(安氏)가 터를 잡았으며 그 뒤 송씨(宋氏)가 들어와서 제당(祭堂)을 짓고 동명을 태고진(太古津)이라 했으며 김씨(金氏)가 들어와 태부(太夫)로 개명하였다가 다시 대부(大夫)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영덕현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영덕군 동면(東面)지역으로 태부(太夫)라 하였는데 1914년 4월 1일 일제(日帝)는 총독부령 제111호에 의해 전국의 행정구역을 자의로 통폐합 할 때 태부동으로 하여 오보면(烏保面)에 소속시켰다가 1934년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대부동(大夫洞)으로 하여 영덕면에 편입시켰으며, 그 뒤 1979년 5월 1일 대통령령 제9409에 의하여 영덕면이 읍으로 승격되자 영덕읍에 소속되었으며, 1988년 5월 1일 군조례 제972호로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대부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대부리의 위치는 영덕읍 소재지에서 동북 해안쪽으로 7km 거리에 있는 해안 마을로 동은 동해에 임해 있고, 서는 삼계리와 남은 강구면 하저리, 북은 창포리가 있다.

         

 
샛것마을 :
대부리 동쪽에 있는 마을.
 
아릿것마을 :
대부리 아래에 있는 마을임.
 
웃것마을 :
대부리 위에 있는 마을임.

         

▒ 화천리(華川里)

  화천리 동명의 유래는 화개동의 화(華)자와 금천동(琴川洞)의 천(川)자를 따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시대에는 영해부(寧海府)에 속했으며 대한제국 때에는 남면(南面) 지역이었는데 1914년 3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영덕군 축산면(丑山面)에 속했으며, 그 뒤 1988년 5월 1일 동을 리(里)로 개칭할 때 화천리라 했으며 1993년도에 영덕읍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 행정동으로는 1, 2, 3리로 분동되어 있다.
  화천리의 위치는 동은 축산면 기암리, 서는 지품면 삼화리, 남은 화수리, 북은 축산면 대곡리가 있다.

         

 
거릿마 :
길골 동쪽에 있는 마을임.
 
곰창(態倉) :
화천리에서 으뜸되는 마을로 웃곰창과 아랫곰창이 있다. 곰창이란 명칭은 옛날 화림산과 국사봉에 곰이 많았는데 사냥꾼들이 곰을 잡아 가둔 흔적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고 하며, 16세기 중기인 명종(明宗) 연간에 충의공(忠義公) 김문기(金文起) 선생의 4세손인 김영철(金永哲)이 몸을 숨기기 위해 이곳을 찾아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길골(道谷洞) :
금천 서쪽에 있는 마을로 16세기 중기인 중종(中宗) 연간에 함양박씨의 진사(進士) 박성규(朴聖奎)가 들어와 마을을 개척했다고 하며, 그 뒤 김해김씨와 영양남씨가 들어왔다고 하였다.
 
너말(너매말) :
금천 서쪽 산 너머에 있는 마을임.

 
무징(武徵) :
화천리 서쪽에 있는 마을임.

 
싯집마 :
거릿마 동쪽에 있는 마을임.

 
아랫곰창(琴川) :
곰창 아랫쪽에 있는 마을로 금천이라고도 하는데 마을 주위 경치가 아름답고 또 수석(水石)이 좋아 붙여진 이름으로 16세기 중기인 명종(明宗) 선조(宣祖) 연간에 강릉함씨(江陵咸氏) 만호(萬戶) 함득선(咸得善)이 마을을 개척했다고 한다.
 
양지마 :
음지마 북쪽에 있는 마을임.

 
웃곰창(華溪洞 : 감촌) :
곰창 윗쪽에 있는 마을임.

 
음지마 :
화천리 음달쪽에 있는 마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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